[기고] 첫눈이 내릴 땐 시집을 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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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첫눈이 내릴 땐 시집을 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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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0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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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물은 온도에 따라 수증기, 비, 눈으로 바뀐다. 본질은 같은데 형태만 바뀌므로 이를 물리적 변화라 한다. 추운 겨울날 하늘에서 함박눈이나 싸락눈이 내리면 사람은 금방 어린애 심정이 된다. 바둑이와 뛰놀던 그 옛날로 돌아간다. 흠 없는 순백의 세계, 누구나 하늘을 우러러보게 되고 누구나 시인이 된다. 하나님이 삭막한 겨울을 포근하게 보듬어주는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①첫눈이 내린다. 흙에 닿으면 흙으로/눈물로 닿으면 눈물로/내리는 쪽쪽 녹으며, 자꾸 내린다.//웬 슬픔들 여기엔 이리도 많은지/동구 밖 넓은 길 훠이훠이 떠돌다가/더는 몸 비빌 곳 없어 찾아오신 넋들//구름 위에서 구름이 부서진다./바람 앞에서 바람이 부서진다.“(강은교/첫눈)

②”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곽재구/첫눈 오는 날)

③”첫눈이 오고, 해맑은 순이의 눈처럼, 아침이 밝아/뽀드득뽀드득, 사박 뽀드득, 수줍음으로 내딛는 백두대간의 첫 발자국/파르르 가슴 떨리는 열여덟 순이가, 처음 밟아보는 그리움의 소리“(권경업/첫눈 온 날이면)

④”첫눈이 내리는 날은 빈 들에/첫눈이 내리는 날은, 캄캄한 밤도 하얘지고/밤길을 걷는 내 어두운 마음도 하얘지고/눈처럼 하얘지고/소리 없이 내려 금세, 고봉으로 쌓인 눈 앞에서/눈의 순결 앞에서/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시리도록 내 뼛속이/소름이 끼치도록 내 등골이“(김남주/첫눈)

⑤”깨어진 얼음덩이가, 풍덩거리는 저수지 위를, 얼음조각만 밟고/통통 뛰어 건너편 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고라니를 보았다/순간처럼, 빠르게 물수제비를 뜨듯, 가볍게 몸을 날려, 저수지를 건넜던 것이다/ 저렇듯 가벼운 몸짓으로, 내 마음속에 첫눈이 내린다/하늘의 공기방울을 밟으며, 내 마음을 통통 가로질러 온다“(김수목/첫눈)

⑥”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인 지 석 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 없지만, 첫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버리지만/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김윤희/첫눈)

⑦”입김만으로도 따뜻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기다리는 눈은 안 오고 손가락만 시린 밤/네 가슴속으로 내려가 너를 깨울 수만 있다면 나는, 더 깊은 곳 어디라도 내려갈 수 있다/종소리에 놀란 네가 잠에서 깨고 잠옷바람으로 언뜻 창밖을 내다볼 때, 첫눈 되어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반색하며 기뻐하는 너를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쌓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햇빛에 녹지 않는 응달이 되어, 오래도록 네 눈길 끌었으면 좋겠다“(김재진/첫눈 생각)

똑같이 물(H₂O)인데 수증기가 될 때와 눈(snow)이 될 때에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똑같은 인간이라도 남편(아내)으로 처신할 때와 아버지(어머니)로 설 때의 모습과 느낌은 크게 다른 것이다. 안개를 보고 느끼는 마음, 비를 보고 느끼는 상념과 달리 눈, 그것도 첫눈이 내릴 때에는 많은 사람이 한번쯤 머언 추억의 되돌이표를 반추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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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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