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온도에 따라 수증기, 비, 눈으로 바뀐다. 본질은 같은데 형태만 바뀌므로 이를 물리적 변화라 한다. 추운 겨울날 하늘에서 함박눈이나 싸락눈이 내리면 사람은 금방 어린애 심정이 된다. 바둑이와 뛰놀던 그 옛날로 돌아간다. 흠 없는 순백의 세계, 누구나 하늘을 우러러보게 되고 누구나 시인이 된다. 하나님이 삭막한 겨울을 포근하게 보듬어주는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①첫눈이 내린다. 흙에 닿으면 흙으로/눈물로 닿으면 눈물로/내리는 쪽쪽 녹으며, 자꾸 내린다.//웬 슬픔들 여기엔 이리도 많은지/동구 밖 넓은 길 훠이훠이 떠돌다가/더는 몸 비빌 곳 없어 찾아오신 넋들//구름 위에서 구름이 부서진다./바람 앞에서 바람이 부서진다.“(강은교/첫눈)
②”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곽재구/첫눈 오는 날)
③”첫눈이 오고, 해맑은 순이의 눈처럼, 아침이 밝아/뽀드득뽀드득, 사박 뽀드득, 수줍음으로 내딛는 백두대간의 첫 발자국/파르르 가슴 떨리는 열여덟 순이가, 처음 밟아보는 그리움의 소리“(권경업/첫눈 온 날이면)
④”첫눈이 내리는 날은 빈 들에/첫눈이 내리는 날은, 캄캄한 밤도 하얘지고/밤길을 걷는 내 어두운 마음도 하얘지고/눈처럼 하얘지고/소리 없이 내려 금세, 고봉으로 쌓인 눈 앞에서/눈의 순결 앞에서/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시리도록 내 뼛속이/소름이 끼치도록 내 등골이“(김남주/첫눈)
⑤”깨어진 얼음덩이가, 풍덩거리는 저수지 위를, 얼음조각만 밟고/통통 뛰어 건너편 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고라니를 보았다/순간처럼, 빠르게 물수제비를 뜨듯, 가볍게 몸을 날려, 저수지를 건넜던 것이다/ 저렇듯 가벼운 몸짓으로, 내 마음속에 첫눈이 내린다/하늘의 공기방울을 밟으며, 내 마음을 통통 가로질러 온다“(김수목/첫눈)
⑥”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인 지 석 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 없지만, 첫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버리지만/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김윤희/첫눈)
⑦”입김만으로도 따뜻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기다리는 눈은 안 오고 손가락만 시린 밤/네 가슴속으로 내려가 너를 깨울 수만 있다면 나는, 더 깊은 곳 어디라도 내려갈 수 있다/종소리에 놀란 네가 잠에서 깨고 잠옷바람으로 언뜻 창밖을 내다볼 때, 첫눈 되어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반색하며 기뻐하는 너를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쌓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햇빛에 녹지 않는 응달이 되어, 오래도록 네 눈길 끌었으면 좋겠다“(김재진/첫눈 생각)
똑같이 물(H₂O)인데 수증기가 될 때와 눈(snow)이 될 때에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똑같은 인간이라도 남편(아내)으로 처신할 때와 아버지(어머니)로 설 때의 모습과 느낌은 크게 다른 것이다. 안개를 보고 느끼는 마음, 비를 보고 느끼는 상념과 달리 눈, 그것도 첫눈이 내릴 때에는 많은 사람이 한번쯤 머언 추억의 되돌이표를 반추하는 것 같다.